각자의 방

시작하지 못한 시작

푸른새벽81 2015. 3. 3. 01:32

 

 

 

 

마뜩찮았던 금토 1박2일 신입생 OT를 다녀온 후

남은 주말은 엉망이 되었다.

 

시내까지 나가 일부러 공수해온 엽떡과 순수우유케잌이 단단히 얹혀

새벽에 게워내느라 눈물을 쏙 뺐다.

 

아플 것 같은 전조가 있을

괜찮다, 괜찮아질 거다, 속으로 되뇌곤 한다.

혼자살게 되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다.

 

그 밤도 거북한 속을 달래보느라 콜라와 액체 소화제를 마시고 누워

주문을 외우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불현듯 눈이 번쩍했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급하게 뛴다고 뛰었는데 변기 뚜껑을 올리는 0.001초 때문에

자세를 낮추지 못해 토사물이 사방으로 튀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도 한참 변기에 머리를 박고 속엣것을 쏟아냈다.

 

혼자살면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모두 내 몫이다.

아픈 것을 뒤로하고 내 몸에서 나온 잔해들을 청소하고 침대에 눕는데

혼자 아파 서럽다는 생각보다,

월요일 출근할 수 있을까. 중요한 날인데 큰일이다, 걱정이 앞섰다.

 

위통약 두알을 삼키고 일요일을 종일 누워보냈다.

자다 깨다 통증에 윗배를 쓰다듬다가 다시 잠들고 했다.

 

내 인생에 새로운 인연이 될지 모를 이 첫 출근,

또 그런 인연이 될지 모를 아이들과 첫 대면을 앞둔 주말이었다.

 

이 글을 쓰며 정리하다보니

'새로운 사람'에 대해 생각보다 더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타인의 평가에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얼마쯤 그들의 평가가 두렵고,

혼자하는 일들이 익숙해지는 만큼

낯선 이들과 관계를 적립해가는 것이 부담스럽다.

 

스트레스에 약한 나는 그래서 정직하게 아팠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이 일과 맞지 않는 사람이다.

 

 

역시나 전쟁 같은 월요일을 지났다.

물론 작년이나 재작년에 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새학기 첫날은 어김이 없다.

 

새로운 사람들의 시작을 돕는 자리에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말 한마디가 행동 하나가 그들의 시작을 망칠 수도 있겠구나, 조심스럽다.

 

그런 중에 나의 새 시작은 언제쯤 가능한 걸까 의문이 든다.

내가 걱정하거나 두려워해야 하는 건 그들의 출발이 아니라

여전히 시작되지 못하고 있는 나의 시작이 아닌지.

 

이 일을 얼마동안 더 해야 할까.

 

아무런 성과 없고 뚜렷한 대안 없는 현재의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겠지.

 

매일 다른 고민들 속에서도

지금 이대로 살아선 안된다는 결론만은 또렷한데,

내 빈 손이 자꾸 그걸 외면한다. 

 

 

가난한 사람이 어째서 오래도록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지

알 수도 있겠다.

 

밥통을 걷어차고 무언가를 해볼 결단력은

엄청난 자신감과 배포에서 나온다는 것.

 

가난한 사람의 유전자엔 전해져내려오지 않을

희귀한 용기.

 

 

때이른 결론과 반복되는 고민들 속에 하루가 또 흘러간다.

 

서른 다섯 살의 첫번째 게절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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